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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개방 30년
사진으로 본개혁개방 30년
글/ 사진/ 안거(安哥)

“안거의 본명은 펑전거(彭振戈), 저명한 촬영가다. 1968년, 베이징에서윈난(云南) 시쐉반나(西雙版納)로 가서 7년간 농간(農墾) 노동자로 있다가1975년, 광저우(广州)로 돌아와 노동자로 일했으며 1979년, 중국신문사(中國新聞社) 광둥(广東)분사 촬영기자로 재직했다. 1988년 말부터 홍콩 <중국여행> 화보의 기자, 편집으로 근무했고 1994년 9월, 다시 중국신문사 광둥분사로 돌아와 촬영기자로 근무했다. 2001년부터 광저우 지청(集成)영상유한회사에서 고급 컨설턴트로 근무하고 있다.

1957년, 나는 ‘조국의 꽃봉오리’들을대표해 중국을 방문 온 후즈밍(胡志明) 베트남 주석께 생화를 올렸다. 1966년 8월,‘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나는 동창들과함께‘ 다촨롄(大串聯, 문화 대혁명 시기에홍위병이 전국 각처로 나아가 교류했던 것을 일컬음)’의 명의로 전국 10개 성의 도시와 강산을 돌아다녔다. 몇 개 성을 유람할때 몸에 지녔던 일본산 PETRI 2.8 사진기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게 됐다. 1979년, 32세 때 나는 중국신문사 광둥분사의 뉴스 촬영기자가 되는 행운을 가졌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환갑 나이가 된 오늘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나는 어느새 새 중국 반세기의 풍상과 30년간의 변혁 과정을기록한 증인으로 남게 됐다.

교민지역의 ‘초기자본’

광둥은 중국의 남쪽 대문이고 중국에서가장 일찍 대외로 개방한 곳이기 때문에 개혁개방의 ‘창구’로 불리우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젊은 동료 기자들과 함께 시대 변혁의 천태만상을 직접 목격하게 됐다.

1981년, 나는 퍼산(佛山) 지역에서 열린광둥성 교민송금사업회의(僑匯工會議)의 취재를 맡게 됐다. 회의에서 ‘교민가족’, ‘교민송금’‘, 교민우정 송금업’‘, 가족부양비 송금’ 및‘ 교민주택정책’ 등이 이슈로 떠올랐다.어릴 때 나는 꿈결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논쟁에서 이런 단어들을 자주 들어보았기에 아주친절한 느낌이 들었다.

교민 송금을 격려하기 위해 지방에서는수많은 우대정책을 내어 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교민 송금으로 기계설비를 구입해 가정 수공업소와 같은 작은 공장을 만들어 교민 가족의 취업문제를 해결한다는 조목도있었다. 처음에 정부는 개인이 꾸린 공장은최고 5명의 노동자만 모집할 수 있다고 규정했으며 ‘착취’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그 후 10명, 20명으로 늘었고 그 다음에는외자가 투자한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주강 삼각주에 일어섰다. 현지 농민들은 저마다 ‘발의 흙을 씻어버리고’ 공장에 들어섰다. 개혁개방의 조류 속에서 교민정책은 교민 가족들이 부자로 되기 위한 ‘초기 자본’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됐다.

1983년, 나는 광둥 둥관(東莞)에 취재를갔다. 당시에 벌써 적지 않은 홍콩, 마카오상인들이 찾아와 각양각색의 공장을 세우고 있었다. 대량의 농촌 잉여노동력이 모여와 스웨터를 짜거나 수공으로 초롱 만들기,손목시계 조립, 옷 가공 등 일들을 맡아 했다. 작업장 벽에는 현지 여성들이 즐겨 쓰는검은 레이스가 달린 모자들이 줄지어 걸려있었다.

80년대 중반, 둥관은 노동력 부족으로 웨베이(粤北, 광둥 북부지역) 산간지역과 구이저우(貴州), 광시(广西) 등지로 가서 노동자를 모집했다. 1988년에 다시 취재 갔을 때현지에는 전국 20여 개 성에서 온 20여 만명의 외지 품팔이꾼들이 모여 있었다. 90년대 중반에는 외지 노동자들이 1백만 명 이상이나 되어 현지 인구와 맞먹었다. 21세기에 이르러 둥관에는 논밭이 거의 없었으며외래 노동자의 수는 1천만 명을 넘어섰다.

광저우의 첫 패션거리

가오디졔(高第街)는 광저우 시중심의 오랜거리로 바로 우리 집 뒤에 위치해 있다. 이거리는 최초로 개인 옷 장사꾼들에게 개방한 패션거리다. 처음에는 귀향한 지식청년들만 자기 집 문앞에 가게를 차리도록 허락했는데 거의 모두가 홍콩에서 들여온 싸구려 옷들이었다.

그때 나는 취재 길에 우연히 한 여자애를 만나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그녀는 부끄러워 숨어버렸다. 그 뒤 그 여자애와 익숙해지면서 그녀가 귀향한 지식청년이며 정부에서 일자리를 해결해줄 방법이 없어 개인별로 장사 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사람들 마음속에 장사는 천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가게를 지킬 때 언제나 판매대 아래에 숨어 있다가 손님이 찾아와야 일어서곤 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즉시 집안에 숨어버렸다.

몇 년이 안 되어 가오디졔는 점점 흥성해졌다. 80년대 중기와 말기에 여기는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패션도매시장으로 변해 날마다 전국 각지에서 온 개인장사꾼들이 운집했다. 어디에나 크고 작은 보따리들이 쌓여 있었고 거리에는 사람들로 붐비었으며 아침부터저녁까지 분주한 모습이었다. 마치 90년대 베이징의 시우수이졔(秀水街)나 홍콩의 먀오졔(廟街)처럼 이곳은 외지 사람들이 광저우에오면 꼭 들러 보는 관광지로 변했다.

199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 소집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광저우 <양청(羊城)석간>은 내가 80년대에 촬영했던 사진들로 전면 특집을 만들고 ‘눈빛(眼神)’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눈빛’은 당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1999년 초의 어느 날, CCTV(중앙텔레비전방송)의 ‘새 중국’ 촬영 팀이 광저우로와서 나를 인터뷰 했다. 그들은 특집 ‘눈빛’이 발표된 <양청석간>을 들고 나와 함께가오디졔로 가서 18년 전 내가 취재했던 그부끄럼을 타던 여자애를 찾았다. 소문을 듣고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목에 금 목걸이를 건 귀부인 모양의 중년 여성들이 줄지어찾아왔다. 그녀은 즐거운 듯신문의 사진을들여다 보면서수다를 떨었지만 누구도 사진속의 여자애가누군지 알아 맞추지 못했다. 그녀들은 “나도당시 이 여자애처럼 일자리가 없어 옷 장사를 했는데 친구들을 만날까봐 두려웠고 정책이 변할까 봐걱정 했 다.”고말했다.

새 중국 첫 미인선발대회

개방 초기에 미국 하와이의 중국 교민들이 ‘하와이 수선화 황후 방문단’을 조직하여 대륙으로 와서 관광과 친척방문을 했다. 이 방문단에 하와이 중국인들이 선발한‘황후’와 ‘공주’가 있었기에 가는 곳 마다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였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외국의 미인선발대회에 호기심으로가득 찼다.

1985년 초, 광저우시 공청단위에서 ‘제1회 양청 청춘미 경기’라고 하는 미인선발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는 중국 대도시에서진행한 첫 미인선발대회였다.

‘시험관’이 선수들의 표현능력, 몸매와기질, 용모와 자태 등에 대해 심사했다. 광저우 패션회사 패션모델 팀의 배우들은 옷차림이 화려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했지만 문화수준이 낮아 표현능력과 수양 등에서 점수를 따지 못했다. 백조호텔의 셰뤄치(謝若綺)씨는 푸른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올랐는데 대범하고 단정했으며 앳된 얼굴에고혹적인 미소가 흘렀다. 그녀는 영어와 일본어로 시험관과 대화를 나누어 관중들을놀라게 했고 마지막에는 일본노래 한 곡을불러 큰 갈채를 받으면서 당장에서 초심에합격됐다.

초심이 끝난 뒤 미인선발대회가 비난을받기 시작했다. 주최측에서 여러모로 노력한 끝에 경기는 좌절되지 않았지만 국내 보는 제한 받았다. 하여 이번 경기는 신비주의 색채가 더 해졌으며 항간에서 논란이 분분했다. 젊은이들은 대다수 찬성하는 태도지만 중. 노년들은 찬반이 엇갈렸다.

3월 6일, 정월보름날 저녁, 결승전은광저우 중국대주점에서 성대히 열렸다. 경기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장내 700여개 좌석은 꽉 찼고 문입구까지 구경꾼들로매웠다.

심사위원은 주최측인 공청단위, 성 라디오방송국, 성 텔레비전방송국과 양청석간의대표 외에도 광둥의 저명한 산문가인 친무(秦牧), 천쌍(岑桑) 등 문학가와 무용가, 화가,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홍콩의저명한 훠잉둥(霍英東)도 가족, 친구들과 함께 구경하러 왔다.

유감스럽게도 준비되었던 수영복 쇼가

취소됐다. 경기 전반 과정에 운동복 한 벌만주최측에서 제공한 것이고 나머지 복장은모두 선수들이 스스로 준비한 것이었다.최종 심사가 끝나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장내는 물 뿌린 듯 조용해 졌다. ‘양청스타’ 미녀 우승에 ‘셰뤄치’의 이름이 발표됐다. 그녀는 세련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원피스를 입은 1.72m 키의 몸매가 한결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미남 우승은 키가 가장작은 왕쯔졘(汪子健)이 차지했다. 그는 너무감동되어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전공군 지상 근무병인 그는 당시 광저우 철도국 센터의 방역일꾼으로 있었다.

천무는 이번 미인선발대회를 ‘건강하고문명스럽다’고 평가했다. 천쌍도 “오늘 저녁 프로는 흠 잡을 데가 없다”고 말했다.한 독일 기자는 “당신네 미인선발은 참 특이하네, 내재적 미에 대한 요구가 높아 외국의 미인선발과는 다르군. 오늘 파티는 참 풍부하고 다채로웠어.”라고 평가했다.

나의 임무는 해외로 원고를 발송하는 것이었다. 당시 광저우는 우전국에서만 팩스로 사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이면우전국은 퇴근하기 때문에 사진을 발송할수 없었다. 나는 사전에 20명 결승전 선수들의 사진을 문자까지 달아 발송했다. 선발결과가 나오자 그쪽 편집들은 결과에 따라사진을 발표했다. 이튿날, 홍콩의 여러 큰신문들의 제1면 톱기사에 모두 내가 찍은사진이 실렸다. 영문으로 된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아주주간(YZZK)>그리고 일본 <아사히신문> 등도 큰 지면을할애했다. 하지만 수많은 홍콩기자들의 원고는 발표되지 못해 속보로 쓸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원고는 또 싱가폴, 말레이시아, 태국, 미국과 캐나다 등 지역의 화교 신문들에도 발표됐다.

‘미스 차이너’가 ‘미스 유니버스’의 황관까지 머리 위에 쓰게 된 오늘, ‘양청스타’의 선발은 여전히 획기적인 상징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성 해방’의 시작이었고 ‘신체혁명’의 첫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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