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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가의 대표주자인 공자는 “부와 귀는 인간의 욕망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하는 사상은 중국여러 왕조와 시대를 초월, 몇 천 년을 줄곧 이어왔다. ‘아편전쟁’의 폭발로 중국 청조 시대의 ‘천조 대국’ 꿈이 산산조각 났다. 그후 약 한 세기를 거치는 동안 중국은 줄곧 치부에 대한 경시와 탐색을 거치며 조금씩 눈을뜨기 시작했다.
80년대‘돈’에 대해 담론하는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데서부터 ‘치부는영광스러운 것’이 되기에 이르기 까지 격변의시기를 맞는다.
1978년, 얼음이 녹듯 중국은 역사적 격변기를 맞이했다.
12월 18일~22일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가 열리고 사업의 중점을 ‘사회주의 현대화건설’로 전환한다고 선포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중앙경제사업회의에서 “일부 도시가 먼저 부유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 후 그는 다시 “일부 지역, 일부 사람이 먼저 부유해지도록 한다. 그 최종 목표는 전 국민이 함께 부유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유’라는 말이 다시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고 사회 전 분야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관심을 갖고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의제로떠올랐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일이다.
지난 수 십 년간 공기업과 사기업의 합작경영 개조, ‘대 약진’과 10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는 동안 ‘개인적 재부’는 거의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낱말이 돼버렸다. 그때는 만약 자전거 짐실이에 닭이나 오리를 3마리 이상만 달고 다녀도 ‘자본주의 꼬리’로 간주되어 ‘잘리울’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큰 솥 밥 먹기’가 전국 모든 지역에 퍼지고 심지어 옷까지도 통일 복으로 입도록 했다. 이로써 빈부 격차를 아예 없앰을 의미하는 한편 동시에 사람들의 창조성과 적극성까지도 약화시키고 억제시켰다.
‘계급투쟁을 원칙으로’에서‘경제건설을 중심으로’에 이르기까지 비록 처음엔 의혹과 우려가 있었지만 사람들이‘잘 살 수있는 세상’에 대한 갈망은 급속도로 용솟음쳐 나왔다.
개혁은 우선 농촌으로부터 시작됐다. 30년
전, 어느 추운 겨울 밤, 안후이성(安徽省) 펑
양현(鳳陽縣) 샤오강촌(小崗村)의 농민 18명이 비밀리에 땅을 나누기로 결정을 지었다. 단간(單干. 개인이 농사를 짓거나 경영을 함), 당시‘대역죄’에 해당하는 위험한 거동이 그 후‘제도의 변혁을 가져오는 파워’에 비유되며샤오강촌은 하루 아침에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이어 가정을 단위로 한 청부 책임제가 중국 농촌개혁의 기본 국책이 되면서 식량이 충족해졌을 뿐 아니라 농민에게 충분한 토지청부경영권을 부여해 줌으로써‘도시에서도 너도나도 시도해보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베이성(湖北省) 이창시(宜昌市)의 셰밍완(謝明萬)은 면방직 공장의 노동자였는데 18위안(元) 밖에 안 되는 월 수입으로는 여섯식솔이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1979년, 그는 공장에서 사직하고 후베이 농촌에서 거북을 구입해 광저우에 되넘겨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첫 장삿길에 2천 위안의 이윤을 얻은 그는 이돈으로 광저우에서 다른 물건들을 구입해다이창에 돌아와 팔았는데 그의 노점 앞엔 물건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당시 물건 값은 부르는 게 값이 었어요.”세밍완은 이창에서 첫‘개인영업자’가 되었으며 또 이창에서 첫‘만 위안 호(연간 소득이 1만 위안에달하는 가정)’가 됐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수 천 수 만의 세밍완
과 같은 ‘개인영업자’와 ‘만 위안 호’가생겨 나왔으며 이들은 중국 최초로 ‘먼저부유해진 사람’이 됐다. ‘만 위안 호’란 세글자에 대한 부러움을 사람들은 더는 감추지않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으며 광저우의 개인경영자들을 ‘잔제자이(站街仔. 길거리에 나선 상인)’라고 경멸조로 부르기도 했다.
선전(深圳) 등 5개의 ‘경제특구’를 설립하고 ‘과학기술은 곧 제1생산력’이라고 제기한 등 정부가 실제 행동으로 지원하고 나서자 금을 캐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창업’이라는 낱말이유행되기 시작하고 신흥 회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로 시작으로 롄시앙(聯想)의 류추안즈(柳傳志), 젠리바오(健力寶)의 리징웨이(李經緯), 하이얼(海爾)의 장루이민(張瑞敏) 등 수많은 유명 기업가 들이 나타나게 됐다. 따라서 1984년은 ‘중국 회사설립의 원년’이라고 불리게 된다.
중국인민의 생활은 점차 빈곤 속에서 떨쳐 나와 풍족한 생활로 향하기 시작했으며 무너지기 직전의 국민경제도 소생하기 시작했다. ‘치부는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구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기간 몸담고 있던 ‘혁명’ 속에서 헤어나와 새로운 경제와사회 건설에 뛰어들도록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