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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일심전력으로 발전을도모하 는 시대다.
1992년 8월 10일, 선전에서 처음 신규 주식구매 추첨표를 발행하자 150만여 명의 주식투자자가 특구로 몰려들었다. 수만 명이 뜨거운햇볕아래서 주식거래소 앞 콘크리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대기하고 있었고 물병이며 1회용도시락들이 도처에 나뒹굴었다. 개인이 재화를 추구하는 것을 더는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상하이 증권거래소, 선전 증권거래소가 연이어설립되고 ‘주식’이 처음으로 중국인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재화를 모을 수 있는 경로도 넓어졌다.
“계획경제가 곧 사회주의인 것은 아니다.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인 것도 아니다.”1990년대, 덩샤오핑이 남방 여러 도시들을순찰했다. 그때 당시로는 아주 ‘대담’했다고 할만한 이 판단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개혁개방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토론에 확고한 답장을 주었으며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 목표를 확립함으로써 중국 역사에서 경제발전이 가장 빠른 시대를 열었다.
중국 국무원이 연이어 조세분리제(分稅制.중앙과 지방의 재정수입 및 관리권 분리) 재정관리체제, 금융체제개혁, 대외무역체제 종합정비 및 의료. 주택시장화 등을 실행하는여러 가지 중대한 결정을 지었다. 시장경제의요구에 부합되는 제반 체제의 수립을 개혁의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빌딩들이 우후죽순마냥 우뚝우뚝 들어섰다. 중국의 도시 건설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갔으며 도시화 수준도 높아졌다. 냉장고,컬러TV 등 현대화 가전제품들이 일반 가정에 날아들고 세계 유명브랜드들도 속속 중국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의 직업과 생활에 대한 선택도 갈수록 개방되고 다양해졌다. 이럴즈음에 ‘민궁차오(民工潮. 농민공의 도시유입 물결)’가 일어났다. 농촌의 생산력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토지로부터 해방된 수많은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기회를 찾아 대도시로진출했으며 신흥 기업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지식인, 정부 공무원들이 앞다투어
‘상해(商海)’즉 상업화 물결에 뛰어들었는
데 이런 현상을 ‘바다에 뛰어든다(下海)’
고 비유했다. 그 중에는 지금 이름을 떨치고
있는 기업가들도 적지 않다. 국무원 연구 센
터에서 근무하던 천둥성(陳東升)은 사직하고
‘쟈더 경매(嘉德拍賣)’를 창건하고 ‘타이캉 생명(泰康人壽)’을 설립해 중국 보험업계선두주자가 됐으며, 내몽골 정책연구실의 궈판성(郭凡生)은 베이징에서 후이충(慧聰) 컨설팅회사를 설립해 그 후 국내 최초 상장사인B2B 전자비즈니스 서비스회사로 발돋움했다. 또 국가체제개혁위원회에 임직했던 펑룬(馮侖)은 하이난(海南)으로 남하해 판스이(潘石屹), 이샤오디(易小迪), 왕궁쵄(王功權), 왕치푸(王啟富), 류쥔(劉軍) 등과 함께‘하이난완퉁(海南万通)’을 설립했다. 이들은 ‘완퉁6거두(万通六雄)’로 불리며 그 후 중국 부동산업계의 대표인물로 됐다. 선전의 런정페이(任正非)는 화웨이(華為)사가 자체 연구 제작한 대형 교환기에 힘입어 회사의 판매액을 1억 위안대로 끌어올렸다. 기업가가 점차 사회의 스타로 떠올랐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우상이 됐다.
이때 ‘양백만’이 불쑥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양화이딩(楊懷定). 1988년 전까지 국유기업 노동자로 있다가 당시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 가지로 주말에 몰래 ‘토요일 공정사’로 일하면서 부수입을 벌어들이곤 했다.1988년 4월의 어느 날 <뉴스 보>에서 “상하이에서 국채 거래를 개방한다”는 뉴스를 읽은 그는 부쩍 마음이 동했다. 전국 8개 도시국채의 가격차가 아주 큰 것을 발견한 그는타 지역 국채 장사에 나서 대박을 터뜨린다.이어서 그는 기회를 틈타 상하이 탄의 첫 증권투자자 중의 한 사람이 된다. 그가 사들인첫 주식 ‘덴전쿵(電真空)’이 반년 후에 원가보다 8배 이상 뛰어 순 수입 150여 만 위안을 벌어들였다. 당시 상하이 일반 샐러리맨의월 소득은 100위안 정도였다. 중국 제1세대주식투자자의 탄생과 더불어 ‘돈이 돈을 낳는다’는 자본 개념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자라나기 시작했다. 수 천 년을 전해 내려온‘부지런하면 치부한다’는 관념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면서 제각기 신통한 솜씨를 보인다(八仙過海,各顯神通)’는 말이 있다. 이 시기 각 업종에서 모두 백방묘계로 재화를 창조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유행처럼 변해가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초보적으로 구축되고 점차 보완되어 갔다.세기가 교체될 즈음해서 백성들이 사는 집이 커졌고 길이 넓어졌으며 소득은 갑자기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중국 국민의 생활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자는 수준에서 호화사회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1996년 <치우스 (求是)>잡지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100만 위안이상 자산 소유자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부자가 더 이상 더럽고 하찮은 것으로 간주되지않게 되었지만 ‘배금주의’ 관념이 만연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21세기 재테크가 일종의 생활패턴으로 부상한다“. 당신이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재화는 당신을 거들떠보지 않는다(你不理財,財不理你)”. 현재 중국인들 중에서 널리유행되고 있는 말이다. 과거에 사람들이 ‘재테크’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저축에 국한되었지만 현재는 펀드, 주식, 보험, 황금, 환율등 낱말이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2001년, 중국은 장장 15년간 끌어온WTO(세계무역기구)에 공식 가입함으로써 세계화 물결의 새 장을 열었다. WTO 가입은중국의 ‘제2차 개혁개방’으로 일컬어진다.
“모든 세계 유명 브랜드 의류가 중국에서임 가공생산이 되고 있다” 중국 무역촉진회방직업분회 장옌카이(張延愷) 상무부회장이말했다. 많은 중국 기업이 성장했으며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세계로 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기업들도 분분히 중국에 입주하기시작하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빠른 나라 중의 하나로 되었다. 이와 함께인터넷이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바꿔 놓으면서 새로운 재벌신화를 창조했다. 소호(搜狐.Sohu), 아리바바(阿里巴巴. alibaba), 텅쉰(騰迅. Tencent), 왕이(網易) 등 기업들이 인터넷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힘입어 세계 경쟁에 맞서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고 중국 국민의 소득 수준이 안정되면서 2006년 전국 주민 예금액이 16조 1587억 위안에 달했다. 따라서사람들이 이재에 대한 의식도 점차 강화되고있다. ‘공민의 합법적 사유재산은 침범하지못한다’는 내용이 헌법에 등재되고, 2007년10월 물권법(物權法)이 정식 실행되기 시작했으며, 주민의 재산성 수입 증대가 중국공산당제17차 대표대회 보고 내용에 기입됐다.
사람들은 재화의 증가가 생활수준과 생활의 질을 높였음을 확실히 느끼게 됐다. ‘재화적 자유’가 적잖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됐다. 보다 많은 중국인이 취미와 금전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으며 주식투자자가 한때는 매일 30만명씩 늘어나기도 했다. 저축 하고 수입에 맞게 지출하는 윗 세대의 소비관념이 젊은 층들 가운데서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주택대출, 자동차대출 등이 등장하면서 ‘당좌대월’이 새로운 소비패턴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부자 아빠, 가난뱅이 아빠> 등 재테크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팔려나갔고은행, 보험회사 등에서 출시하는 각종 재테크 제품들로 사람들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2006년에서 2007년 사이 주식 ‘호황’을 겪은 후 2008년 세계 전역에 금융위기가 들이닥치면서 중국인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재화’를 보기 시작했다. 일부 상인들의 눈앞의 성공과 이익만 챙기기에 급급한 행위가 사회의 보편적인 비난을받았다. 동시에 환경과 자원의 파괴 등을 대가로 하는 조방식 발전을 계속할 수 없으며반드시 과학적이고 인간 위주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한편 개인들도 물질적 재화가 어느 정도 물질생활의 편안함과 자유를 가져다 줄 수는있지만 정신적 재화의 풍족함만이 진정한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사람들은 재물 외에도 생활에는 다른 중요한 요소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중국 홍콩의 거부 리쟈청(李嘉誠)의 말이 아주 대표성을 띤다. “부귀라는 이두 글자를 반드시 갈라서 봐야 한다. ‘부’한 자가 꼭 ‘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진정귀한 것은 당신이 사회에 무엇을 해놓았는가하는 것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일을 해놓았을 때야만이 당신은 진정한 재화를 얻은 것으로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