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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의 대화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
글|돤이민(段艺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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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张大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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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는 곧 철거할 벽에 그림을 그리고 인부들을 동원하여 라인을 따라 구멍을 내도록 하고는 사진을 찍어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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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의<바람, 말, 깃발> |
벽에 그린 사람 옆모습이 미술계 어필
처음에 장다리는 수묵화 화가였다. 그렇게 몇 년을 그려오던 그는 현대적인 수법으로 전통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모든 것들은 시대를 따르게 마련이다. 시대성을 무시한다면 경쟁력을 잃는다”고 말하는 그는“혼자 화실에서 하는 예술은 고갈되기가 십상이다. 특히 현대예술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없으면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낙서라는 가장 간편한 방식으로 예술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이렇게 장다리는‘중국의 첫 낙서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가 스트리트 아트를 처음 접한 것은 이탈리아에서다. 1989년에 장다리가 이탈리아에 가 거기에서 7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이탈리아는 도시 자체가 스트리트 아트였다고 그는 느꼈다. 그는“이탈리아에서 스트리트 아트는 일반 평민이든 학생이든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스트리트 아트란 결코 예술이 아닌 무기처럼 보였다. 삶의 변두리에서 헤매는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어서 스트리트 아트의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했다”고 털어놨다.
장다리의 첫 그림은 자기의 얼굴 측면을 무너진 벽에 스프레이 하는 것이었다. 한 예술가가 이 도시에서 살아 나가려면 도시와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그의 초기 발상은 단순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리다 보니 그 측면 얼굴에 점차 깊은 의미가 부여됐다.
1995년, 장다리는 베이징에 돌아왔다. 그때는 베이징과 전 중국이 건물 철거와 건설의 열기에 휩쓸리던 시기다. 무너진 벽들을 본 장다리는 창작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철거한 건물이 남겨 놓은 벽 중 적당한 곳을 골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벽에 그린, 굵은 선으로 만들어진 측면 얼굴은 점차 화가 자신이 아닌 한 계층 사람들의 생존 상태를 나타내는 추상적인 캐릭터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그는 곧 철거할 벽에 그림을 그리고는 인부들을 동원하여 라인을 따라 구멍을 내도록 하고는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렇게 찍어둔 사진들이 외국 화상들의 마음에 쏙 들 줄이야. 사진들은 엄청난 가격으로 판매됐고 그의 그림은 뉴욕 타임즈 표지에 실렸다. 이렇게 장다리는 최고 인기를 누리는 중국의 현대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1999년의 첫 개인 전시회를 시작으로 얼굴 측면의 캐릭터는 체계화된 시각적 이미지로 변화됐다.
인체를 소재로 무한한 가능성 표현
장다리는 점차 얼굴 표정 창작을 뛰어넘어 인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소재로 예술 사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열린,‘그래피티’를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장다리의 군상작품(群像作品) 「종족(种族)」이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는 농민공(民工, 농촌에서 도시로 온 노동자)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석고로 주형을 만들고 다시 플라스틱으로 만든 60여 구의 인체 모형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작품이다.“이 작품에서는 사람의 가장 대표적이고 섬세한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가장 원시적인 복사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 모형들은 어쩌면 정말로 살아 있는 듯한 인체 표본처럼 보인다. 그렇게 해야만 더 순수한 게 아닌가”라고 장다리는 설명한다.「종족」계열의 작품들도 그의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일반인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다.“이런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자기의 생활 방식과 미래를 예측 할 수 없는 그 부류 사람들의 막막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재산이 있다면 단지 몸뚱이 하나뿐이다. 나는 몸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그들의 진실한 면을 보여주어 삶의 어려운 면을 제시하고 싶다”고 장다리는 자신의 작품을 분석한다.
공항 연선의 난가오(南皋) 예술인 구역에 위치한 장다리의 세 번째 작업실. 600여 ㎡는 족히 돼 보이는 이곳은 최근에 갖춘 작업실 중 제일 큰 곳이다. 전시청과 작업실이 각각 두 개씩 있었는데, 넓은 객실에서 우리는 대담을 가졌다.
‘그래피티’는 환경과, 작품 「제2의 역사」는 역사와, 「바람, 말, 깃발」과 「종족」은 사회와의 대화라고 볼 수 있는데, 정말로 이런 식의 대화를 끝까지 해나가려는 건지?
나는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화가이며 내 작품들은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봐야 한다. 내가 표현하려는 내용을 순서대로 밝힌다면 환경, 사회, 현실 그리고 정신세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표현 방식이 더 리얼해졌다. 지식인으로서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사고해야 한다. 작품이란 결국엔 아이디어 덩어리이고 국가와 문화에 대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우선 아픈 부위를 찾아낸 후 환자에게 그 내용을 전하듯이 나는 우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류의 생존 환경에 대해 질문을 던진 후에야 재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테크닉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로 해석해도 되는가?
아니다. 중요하다. 내가 중요시 하지 않는다는 건 그림과 그림을 만드는 테크닉이란 뜻이다. 내가 중요시 하는 건 큰 변화 자체다. 매일 무심코 스쳐 지나는 내용들을 예술로 변화시켜 그런 것들을 통해 도시의 변화와 변화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여주고 싶다. 나는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골 사람이 큰 도시에 오면 그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처세술과 교제 방식을 배우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도 따라서 변하게 되고 그렇게 그 도시에 물들어 가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형성하고 고집한다. 반대로 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고집스런 예술은 이미 그 생존가치가 무기력해졌다고 생각한다. 고정 불변하는 스타일은 내 생활과도 어울리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낱 게임 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7년 생활이 본인에게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어릴 적 자라난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헤이룽장성(黑龙江省) 지시시(鸡溪市) 태생이다. 중국 동북지역 사람들의 화끈하고 대범한 성격과, 일하는 면에서의 끈질긴 면이 뼛속 깊이 박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을 충동적으로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건 결코 아니다. 창작을 제대로 하려면 세심하고 이성적인 분석을 통해 가장 적합한 캐릭터와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을 승화시키고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
농민공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국이라는 대상이다. 단지 노동자라는 캐릭터를 통해 표현 할 뿐이다. 우리의 사회에는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중요시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는 면이 있는데 참으로 성숙되지 못한 부분이다. 어떤 시각으로 볼 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농민공들은 늘 도시에서 쫓기고 도시 주민들과 거리감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도시의 지도자들마저 주동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나는 이러한 현상들에 화가 난다. 내 작품들은 이런 것들에 화가 난 상태에서 창작되어 나온다. 물론, 나도 이런 현상들은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좋아질 거란 건 알고 있다.
장다리(현대 예술가)
1963년 헤이룽장성(黑龙江省) 하얼빈시 출생
1983년 중앙공예미술학원(中央工艺美术学院) 입학
1987년~1989년 베이징 원명원(圆明园) 거주, 전문 화가
1989년 이탈리아로 이주
1995년 귀국, 베이징 정착
이탈리아, 한국, 독일, 영국 등에서 전시회 개최. 국민의 생활에 관심을 보인 중국 최초의 예술가로 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