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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짜리 그림이 이것이었구나!

 

글|사진/돤이민(段艺民)

대중에게 어필되는 장샤오강의 작품은 대부분 중국 색깔이 짙다. 그의 그림은 가족사진처럼 중산층의 옷을 입고 계란형 얼굴에 외까풀 눈, 얇은 입술, 퀭하고 딱딱한 얼굴을 표현한 작품이 많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60-70년대 중국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지나간 시대에 대한 추억과 정서를 느낀다. 장샤오강은 행운아다. 그의 작품들은 매번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중국 현대 미술의 신화를 창조했다. 천문학적인 거액의 돈 앞에도 장샤오강은 차분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 어떤 순간에도 내 자신이 예술가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고 다짐한다.

1999년, 쓰촨(四川)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장샤오강은 청두(成都)에서의 안일한 생활에 점차 염증을 느끼게 됐다. 결국 그는 교직을 팽개치고 베이징의 예술적 분위기에 대한 갈망을 안고 상경한다. 41세의 장샤오강은 2만 위안을 손에 든 채 무작정 베이징에 입성했다. 그리고 왕징(望京) 화쟈띠(花家地)의 조그마한 월세 방에서 새로운 창작생활을 시작했다.

‘혈연 시리즈’는 고향 쿤밍을 다녀오면서 영감(靈感)을 얻은 것이다. 부모가 보관한 옛날 사진들을 다시 보며 장샤오강의 뇌리에는 한 장 한 장의 사진 모두가 한 시대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사진들이 역사적 배경도 있었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단정하게 차려 입고 긴장된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듯한 형식화된‘꾸밈’이다. 그리하여 가족사진과 같은 그림들이 그에 의해 그려져 대중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장샤오강은 평소에 과묵하고 조용하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예술인생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거액의 예술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안고 우리는 베이징 교외의 허거좡(何各莊)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작업실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장샤오강 만의 색깔이 다분한 작품들이 벽면에 조용히 진열되어 있었다. 작품 중 인물들의 눈빛은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작업대에 있는 가지각색의 미완성 작품은 작가의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줬다. 책상 위에는 세계 각국의 음악CD가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 있는 소설집 「백 년 동안의 고독」이 특히 눈에 띄었다. 잠시 후 검은색 벤츠 지프를 타고 그가 나타났다. 이제는 그의 상징이 되어버린 안경, 중남해(中南海) 담배 한 갑, 검은색 티셔츠 모습의 장샤오강은 차분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내 마음속의 생각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싶다”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계몽선생님이다. 그는 나를 예술의 길로 들어서게끔 인도했다. 당시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 조심스럽게 선생님 댁을 찾아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는 가장 기초적인 소묘와 색채부터 시작하여 가르쳤고, 전에 접하지 못했던 많은 화첩을 보여주어 시야를 넓혀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사람으로서의 도리까지 가르친 것이다. 2년간 그는 한 푼의 수업료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많은 물감과 재료들을 제공해 가며 나를 가르쳤다.

당신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슬프고 우울한 느낌을 준다. 혹자는 이것을 “개인적인 은밀한 일기식의 표현방식”이라 말한다. 혹 자신이 폐쇄주의 혹은 비관주의자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비관주의는 큰 개념이다. 나는 항상 일정한 거리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관찰하고 체험하는데 습관이 돼 있다. 또 억지로 비관과 슬픔을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천성적으로 명쾌한 주제, 예를 들면 햇살이 화창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딱 보고는“아, 어두운 느낌이구나”라고 한다. 아마도 나의 성격 때문인 것 같다.

그림 그리는 것이 질릴 때가 있는가?

막연할 때는 있지만 질릴 때는 없다. 가끔가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다. 1994년에는 일년 내내 작품이 없었다. 억지로 그리다간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책을 읽거나 전시장에 가거나 한다. 절대로 붓은 잡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과 정력이다. 1995년까지만 해도 매일 10 시간 이상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5-6시간마다 휴식을 취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느리다. 아직도 많은 생각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한평생 머릿속의 생각을 더 철저하게 표현하여 유감을 남기고 싶지 않다.

작품이 고가에 낙찰된다는 소식에 많이 접했다. 작품과 금전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상 외의 많은 것을 얻은 희열로 매일매일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이젠 만족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 분들의 제안에 아직도 할 일이 태산같다는 답 밖에 줄 수 없었다. 10여 년 전 십여 평 정도의 한 화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이렇게 큰 갤러리를 가지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환자라면 예술은 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에 의지할 수박에 없고 예술을 떠난다면 아마 병이 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의 본분이다. 작업실을 떠나는 작품 마다 내 손을 거치고 있다. 내가 그림 하나 적게 그린다 해서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삼성미술관 주문 작품에 약간의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나는 그림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직접 다시 그렸다. 작품에 대한 화가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나의 그림은 시장수요가 있는 만큼 대량 복제하여 판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이것은 예술을 떠나 영혼을 팔아먹는 행위로 생각된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아티스트로서 나의 최저기준이다.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2000년에 처음으로 한국의 광주비엔날레에 참가했을 때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이제는 하도 자주 다니다 보니 무감각해졌다. 한국은 우리 문화와 정말 가깝다. 하지만, 음식은 우리와 달리 지나치게 단조로워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작업의식이 투철하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구축하는데 열중한다.

그날, 나는 장샤오강이 준 화첩을 조용히 펼쳤다. 화첩에서 풍기는 테레빈유의 향기는 오래도록 은은하게 퍼졌다. 화첩의 맨 뒷부분에는 장샤오강의 자기소개와 함께 그의 백일 사진이 실려 있었다. 화가의 50년 전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예술 인생과 그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진 속의 아이도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딱딱한 표정과 형형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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