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잡지를 구독하 |



글|강혜연(韩国)
8월 1일은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이다.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은 이 날 또 한번 널리 울려 퍼질 것이다. 13억 중국인민의 50%이상이 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 이 곡을 만든 이는 연안(延安)군정대학 출신 중국 혁명음악의 대표인물 중의 하나인 정율성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19살의 나이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반항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건너 온‘조선인’이었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1977년 12월 7일, 베이징 천교극장에서 그의 서거 1주년 기념음악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를 기리기 위해 매 년 수많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영화「태양을 향하여」를 비롯해, 해마다‘정율성 음악회’가 중국, 한국에서 열린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를 딛고
민족의 희망을 지녔네.
우리는 불가전승의 역량……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전국의 해방을 위하여
…
수많은 전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일제와 싸워 새 중국의 여명을 맞이했다. 이 곡이 바로 중국혁명음악사상의 이정표라 불리는 정율성 작곡의「팔로군행진곡」이다.
중국 혁명원로 왕진(王震)은「작곡가 정율성」이란 글에서 정율성을 이렇게 평가했다. “당대 중국에서 섭이(聂耳), 선성해(冼星海)의 뒤를 잇는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 무산계급 혁명음악사업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군의 사기 드높인 ‘팔로군 행진곡’
중국 현대혁명음악사의 3대 작곡가로 불리는 정율성은 일생 동안 360여 곡을 창작했다. 1936년에 지은 처녀작「5월의 노래」를 시작으로 대표작「연안송(延安頌)」(1938),「팔로군행진곡」(1939),「조선인민군행진곡」(1948), 가극「망부운(望夫雲)」(1957),「모택동시사곡(毛澤東詩詞曲)」(20여 곡, 1958-1976)등은 모두 20세기 중국음악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14년, 정율성은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해업(鄭海業)은 이름난 서예가였고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식 교육에 반대해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들을 전부 사립학교에 보냈다. 맏형 정효령과 둘째형 정인제는 1919년‘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애국자였던 아버지와 독립운동에 몸 바친 형제들은 어린 정율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33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조선인들의 반일단체인‘의열단’이 난징에 세운 학교)는 제 2기생을 모집하러 조선에 왔다. 그 이후, 정율성은 그들과 함께 중국에 건너와 항일 운동을 시작한다.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다니며 그는 군사, 정치 등의 지식을 쌓았다. 이듬해 학교를 졸업한 그는‘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해 반일 비밀활동을 했다. 또한 타고난 천성으로 성악을 공부하고 바이올린, 피아노를 배웠다. 이 때 정율성은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심정을 나타내고자 원래 부르던‘부은(富恩)’이란 이름을‘율성’으로 개명했다.
1937년, 일제의 대규모 중국 침략으로 수많은 중국의 애국청년들은 팔로군 항일 근거지인 연안으로 달려갔다. 정율성도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연안으로 갔다. 그는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 등에서 공부하며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부인 정설송(丁雪松)은 그의 첫인상을 이렇게 회고한다.“공연할 때 그이는 아주 독특했어요. 철사를 하모니카에 연결해 귀에 걸고 손을 대지 않고 곡조를 불었고 가슴에는 만돌린을 안고 심금을 울리는 선율을 표현했죠. 그뿐 아니라 발은 타악기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 등 세가지를 동시에 연주하면서도 아주 여유로웠지요. 또 우렁차면서도 서정적인 그의 노랫소리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어요. 그이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 무대에 올라 몇 백 혹은 몇 천명의 대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했지요”.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연안에서 생활하며 정율성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그리고 혁명성지 연안에 대해 장엄함을 느꼈다. 「연안송」,「연수요(延水謠」,「10월 혁명행진곡」,「팔로군대합창」등 그를 통해 만들어진 노래들은 중국인들의 가슴을 적셨고, 수천만 청년들을 항일투쟁으로 이끌었다.
그의 노래는 마음을 들끓게 한다
정설송 여사는 당시 정율성과 함께 연안에서 생활했던 전우들의 회고를 이렇게 전했다. “만약 대중의 노랫소리가 열화와 같다면 정율성은 한 점의 불씨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열화와 같은 노랫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당시 정율성은 팔로군, 신사군(新四軍)의 많은 영웅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 추수봉기(秋收起義), 준의회의(遵義會議), 2만 5000리 대장정, 팔로군과 신사군의 적후 근거지 개척등등. 이는 젊은 정율성을 고무, 격려시켰고 그의 음악창작의 원천이 됐다.
1939년 그는 음악가 선성해가 작곡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의 뒤를 이어「팔로군대합창」을 작곡했다.「팔로군대합창」은 8개 곡으로 구성된 대형 군가로서 팔로군의 격앙된 전투정신이 그대로 표현됐다. 웅장한 군가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팔로군대합창」중의「팔로군행진곡」은 공연 후 얼마 안돼 팔로군 각 부대와 항일근거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1949년 새 중국 건국대전에서 연주되어 천안문광장에 가득 울렸다.
1951년 2월,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에 의해 정식으로「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中國人民解放軍進行曲)」으로 지정된 이 노래는 그 후 30여 년간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다. 1988년 7월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으로 마침내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명명됐다.
중국의 저명한 작곡가 언극(彦克)은 정율성이 지은 군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라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자긍심으로 가득 찼다. 국경행사나 사열할 때 이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감동을 받는다.”
50년대 후반 정율성은 베이징 인민예술극원의 작곡가로 활약했다. 백설이 뒤 덮인 동북변경에서 운귀고원(雲貴高原)까지, 황사가 휘날리는 서북지구에서 동해안까지 그의 발자취는 중국 전역에 닿았다. 그는 오랜 기간 공장, 농촌과 부대를 다니며 그들의 생활을 몸소 체험했고 끊임없이 창작의 소재를 찾았다. 1964년 정율성은 이미 200여 곡의 작품을 창작했다. 대개 노동자, 농민에 대한 소재이거나 해방군을 찬양하는 곡이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명랑한 곡을 쓰기도 했다.
연안시절 정율성은 사냥을 좋아했고 또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흥안령(興安嶺)에서 있었던 일화다. 어느 날 아침 총을 들고 나간 정율성은 자정이 다 돼서야 돌아왔다. 다람쥐들을 줄줄이 줄에 동여매고 돌아온 그는 그 날밤「흥안령에 눈꽃이 날리네」라는 곡을 작사 작곡했다. 중국의 소프라노 당영매는 “「흥안령에 눈꽃이 날리네」는 아름다운 서정시이자 한 폭의 수채화 같아 성악교재로도 손색이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인 정설송 여사는 남편을 기리는 글에 이렇게 회고했다.
“창작은 그이 생명의 일부였지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어요.”60년대 중국은 3년 재해로 힘든 시기였는데, 그는 시골로 내려가 직접 농민들과 생활 했다. 그 때「추수봉기」대 합창곡을 작곡했다. 특히‘문화대혁명’시절 부자유스런 몸이었지만 끊임없이 악곡에 전념했다. 한번은 그가 감방 벽에 걸린 그림 한 폭을 보고 갑자기“찾았다!”고 외쳤다. 옆에 있던 사람이 뭘 찾았냐고 물으니“모주석 시사「벗에게 답하노라」의 선율을 찾았다”고 외쳤다. 급한 성격인 그는 바닥에 버려져 있는 나무 판 조각에 떠오른 곡을 적어 두기도 했다.
정율성은 송백같은 굳은 절개를 가졌다. 문화대혁명 시기 그는‘반당분자’,‘간첩’으로 몰려 갖은 압박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모택동 시사에 곡을 다는 작업을 계속했다. 1976년 10월, 문화대혁명이 끝나 그의 명예가 회복됐다. 그는 온 열정을 다해 대형 작품의 창작에 힘썼다. 그러나 그는 뇌출혈로 62세(1914년-1976년 12월 7일)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됐다.
정율성과 정설송, 그리고 정소제
1938년 봄, 정율성은 당시 항일군정대학 여성대 대장인 조령의 소개로 정설송을 만나게 된다. 둘은 성격도 비슷했고 취미도 닮았다. 세계문학명작을 즐겼고 음악도 좋아했다. 정율성은 남몰래 들꽃 묶음을 정설송의 문 앞에 놓아두며 사랑의 마음을 드러냈다. 1939년 양력 설 전야, 정설송은 정율성에게 신년축하카드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눈이 쌓인 소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정율성은 친한 벗에게“나는 뜻이 맞는 동반자를 찾았다”고 자랑했다.
정율성과 정설송 사이에는 무남독녀 정소제가 있다. 정율성이 태항산(太行山)에 있던 때인 1943년 4월의 어느 날, 정설송은 산기슭에서 미끄러져 딸을 조산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 2.5 Kg도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40여 일이 지나니 정설송은 젖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정설송은 정율성이 그토록 사랑하던 바이올린을 팔아 어미 양을 사다가 양젖으로 딸을 키웠다. 바이올린을 팔아 살려낸 아이라고 해서 그들 부부는 딸 이름을‘소제’라 불렀다.
정설송 여사는 신화통신사 평양 초임 지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귀국한 다음 외교분야에서 활약해 네덜란드, 덴마크 대사와 중국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여성 대사였다.
딸 정소제는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음악감각을 가졌다. 중국음악의 최고 전당인 중앙음악대 작곡과에 입학해 공부했다. 졸업 후 군 총정치부문공단(總政文工團)에 입단해 창작활동을 했다. 현재 아버지의 유작을 정리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에서 항상 정율성의 웅장하고 힘이 넘치는 음악소리가 나온다.
정율성의 비문
1976년 12월 17일, 정율성은 베이징 팔보산(八寶山) 중국혁명릉묘에 모셔졌다. 비문에는 이름난 시인 교우(喬羽)가 쓴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음악가 정율성 동지는 자기 생명을 중국인민의 혁명사업에 바쳤다. 인민은 영원할 것이고 정율성 동지의 노래도 불멸하리라. 항일전쟁 초 연안에 온지 얼마 안된 정율성은「연안송」을 지어냈다. 노래는 마치 활개치는 새처럼 순식간에 연안에서 각 해방구로, 전 중국에로, 해외 여러 지역에 날아갔다. 중화민족이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인민들이 열정에 넘쳐 혁명성지 연안으로 달려왔다.
얼마 후「팔로군행진곡」이 창작됐다. 이 작품으로 팔로군, 이 위대한 영웅군대는 자신의 노래를 갖게 됐다. 중국 인민군은 이 노래를 부르며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며 새 중국을 세웠다. 오늘도 우리 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변강을 지키고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을 보위하고 있다. …
정율성은 솔직하고 겸손했다. … 그와 지내다 보면 때로는 과감한 용사와 마주한 듯, 때로는 부지런한 농부를 보는 듯, 때로는 거짓을 모르는 순수한 인간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혁명 사령관도, 숲 속의 사냥꾼도, 물가의 어부도, 광산의 노동자도 모두 그의 친구들이다.‘옛 친구를 만나니 그 정 더 깊어가고 새 친구를 만나니 구면인 듯 하네’.정율성의 서거는 너무도 갑작스러워 지인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2005년11월 제1차 정율성국제음악제가 그의 고향 광주광역시에서 열렸다. 중한 음악계는 이 음악제를 두 나라 음악가들이 정율성의 예술의 혼을 연주하는 무대라고 평가했다. 현재 정율성음악회는 해마다 중국과 한국에서 열려 고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기리고 있다. 2009년은 신 중국 탄생 60주년이자「팔로군행진곡」창작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월 말, 중국인민해방군 군가혁명기념일에 맞춰 하얼빈에서 <军歌嘹亮-군가가 널리 퍼져 울리다>라는 제목으로 정율성작품 음악회가 열린다.
정율성은 항일운동가이자 뛰어난 음악예술인으로서 한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군가의 작곡가로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명절 때가 되면 정율성의 생전 전우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팔보산 혁명열사능에 모인다. 그 날은 어느때보다 더 우렁찬 해방군 군가가 하늘에 울려퍼진다.